안녕하세요? 산업부 박내선기자입니다. 오늘은 최근 제가 만난 두 명의 멋진 여성에 대해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요즘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확 시집이나 가 버려?’ ‘나는 왜 잘난 부모도 든든한 빽도 없는거야?’라며 자신을 학대하는 여성분들은 필히 이 글을 읽으실 것을 권합니다. 제가 그랬듯,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오늘 소개할 두 여성은 공교롭게도 비슷한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한 명은 박경숙, 또 한 명은 박숙경입니다. 물론 두 사람 다 ‘니키 벤조’ ‘세시 박’이라는 영어 이름을 사용하기는 하지만요.

두 사람은 모두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미인계를 써서 성공한 것이 아닌데도 모두 미인들이죠. 남편은 모두 외국인입니다.

우선 박경숙씨는 애니메이션업체인 ‘라프 드라프트(Rough Draft)’의 사장입니다. 라프 드라프트는 국내 애니메이션업계에 잘 알려져있지 않습니다. 이 회사는 디즈니·카툰넷 등 미국 애니메이션회사로부터 그림 그리는 작업을 하도급받아 일을 하기 때문에 국내에 홍보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이 회사가 ‘하청’의 개념을 넘어 ‘원청’을 한 애니메이션 ‘퓨처라마(FUTURAMA)’가 제54회 에미(EMMY)상 단막 애니메이션 부문에서 수상을 하면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원청은 아이디어 단계를 제외한 기획부터 마무리까지의 단계를 모두 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방배동에 위치한 박 사장의 사무실(정확히 말하면 그의 빌딩)은 건축대상까지 받을만큼 아름답습니다. 사장실이 있는 건물 7층에는 미니 정원이 딸려 있고, 그의 방에서 베란다로 나가면 방배동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제가 더욱 부러웠던 것은 사장실에서 남편과 단 둘이 근무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박 사장의 책상이 남편인 그렉 벤조씨(라프 드라프트 아메리카의 사장이자 감독)의 책상보다 더 크다는 점도 부러웠지만요.

지금은 직원수 600여명, 연매출 400억원의 대형 애니메이션 회사의 대표이지만, 박 사장의 앞길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올해 42세인 박 사장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면서 대학 진학을 포기했습니다. 박 사장은 고 3때 진학반 대신 직업반으로 옮기면서 “결코 평범하게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고 합니다.

다짐의 출발점은 영어 공부였습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몸 하나로 살아남는데는 영어가 최고라는 사실을 터득한 거죠. 그는 고 3때 영어 실력을 무기로 무역회사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커피 심부름을 하고 타이핑을 하면서 그녀의 영어 실력을 뽐낼 수는 없었습니다. 사표를 낸 그는 이번에는 정말 영어를 맘껏 쓸 수 있는 곳으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외국업체로부터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도급받아 일하는 회사의 통역관이었습니다.

그는 이 곳에서 어깨 너머로 애니메이션에 대해 배운 후 25살 때 창업을 했습니다. 조그만 아파트를 얻어 미국 애니메이션업체로부터 하청을 받은 대만업체의 물량을 다시 하청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 때 한 파티에서 지금의 남편인 그렉 벤조씨를 만났습니다. 벤조씨는 뉴욕 시라큐즈대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한 후 캘리포니아 오브 아트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한 정통파입니다.

날개를 얻은 박 사장은 지난 93년 남편과 함께 라프 드라프트를 설립했습니다. 박 사장은 고객 관리와 경영 전반을 맡고 남편은 창작 작업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또 다른 ‘박 여사’인 박숙경씨 역시 성공시대의 주인공입니다. 올해 34살인 박씨는 중학교 1학년 때인 20여년 전 미용업계에 입문해 세계적 헤어 디자이너로 성공한 인물입니다. 경북 안동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박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와 중학교 1학년 때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읜 후 서울에 올라와 미용기술을 익혔습니다.

15살에 얻은 첫 직장은 군산의 작은 미용실.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보던 미용실 원장이 ‘너는 더 큰 물에서 놀 애다’라며 서울행을 권해 시외버스 표와 기타 하나, 단돈 2만7000원을 들고 서울에 올라왔다고 합니다.

박씨는 당시 잡지에서 박준미장이 가장 큰 미용실이란 정보를 얻은 후 박준 원장에게 무작정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나는 서울에 가면 먹고 잘 데도 없다’며 협박을 한 결과, 박 원장이 자신의 장모 집에서 박씨를 먹여주며 일자리를 줬다는군요.

박씨는 미용 보조사로 일하며 밤늦게 혼자 남아 마네킹의 머리를 자르고, 아침 일찍 배달온 야쿠르트 아줌마에게 파마를 해주며 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박준 원장에게 ‘다른 미용실에 가서 디자이너가 된 후 돌아오겠다’며 약속을 한 후 당시 ‘미스코리아의 산실’로 불리던 마샬미용실에 취직했습니다.

그가 ‘디자이너’가 된 계기도 재미있습니다. 미용실측은 고향에서 친구가 올라와 하루 무단 결근을 한 그를 명동본점에서 반포점으로 귀향살이를 보냈습니다. 당시 반포점은 직원이 3명뿐이어서 졸지에 디자이너로 승격하게 됐습니다. 그는 이 곳에서 손님들에게 다양한 머리 스타일을 시도해보며 실력을 키웠습니다. 이후 이대입구로 ‘승진’을 한 후, 다시 명동으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디자이너의 위치로요.

그는 또 신흥 멋쟁이들이 모여있던 압구정동으로 자리를 옮겨 이철헤어커커에서 연예인 단골 미용사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모방만 하고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영국 유학을 택했습니다. 영국에서도 그는 무작정 유명 미용실을 찾아가 일하게 해달라는 식으로 취직을 했습니다. 배움에 대한 목마름은 1년 과정의 킹스턴 컬리지를 3개월만에 졸업하고, 런던패션스쿨 입학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박씨는 영국에 간 지 4년만에 자신의 이름을 딴 ‘세시헤어’를 오픈했습니다. 그리고 런던의 상류층들이 이용한다는 엘리자베스아덴 헤어살롱에 ‘수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뽑히는 영광도 얻었죠. 자신의 모교인 킹스턴 컬리지에서는 동양인 최초의 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박씨에게는 키프러스섬 출신의 남편과 그 사이에서 난 딸이 한 명 있습니다. 한 헤어쇼에서 그는 객석에 앉아있는 남편을 향해 ‘Without you, I’m not here. I love you.’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두 여성은 제가 근래 인터뷰한 사람중 가장 ‘쿨(cool)’하다고 느낀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여자들을 인터뷰하면 어떻게든 예쁘게 보이려 하고, 학력이나 집안에 대해 과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은 자신이 남자들을 이기고 대단히 힘들게 일해 성공했다며 자랑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달랐습니다. 저는 기사를 좀더 소설적으로 쓰기 위해 불우한 과거를 자꾸 물어봤는데, 그들은 시원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얼굴에는 ‘이게 신기하니? 그게 왜 중요한데?’라는 표정이 가득했습니다. 현재의 내가 중요하지 과거의 내가 어떤 게 무슨 상관이냐는 식입니다. 당당한 여성을 인터뷰했을 때의 기쁨, 독자들도 함께 느낄 수 있었으면 합니다./박내선드림 nsu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