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남자

뭐 이런일이 다 있나. 나참...
저여자랑 같이 일하라구? 기가 막혀서 말도 안나온다. 여자들, 특히 저런여자들이라
면 내가 몇번 당해봐서 안다. 정말 일 같이 하기 힘든 타입이다.
맨날 일만 있으면 이핑계, 저핑계로 요리조리 빠져나가기만 생각하고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절대로,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는 저런 여자들...
저런여자... 트럭으로 실어줘도 싫다. 몇번 말했지만 정말 싫다.
으...
김영철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는구나...
이사님도 무심하시지... 나같은 촉망받는 남자에게 어떻게 저런 여자를 붙여줄 수 있있을까... 아직도 구미호의 마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것 같다.

그러나 저러나 이번 프로젝트는 상당히 큰 건이라서 웬만큼 신경쓰지 않으면 어려울텐데 이래저래 큰일만 났다.
그냥 저여잔 복사할거 있으면 열심히 시켜먹어야 겠다. 그거 말곤 할 수 있는 것도 없겠지만...


그여자

오늘 새롭게 팀을 이루었어요. 영철이란 사람과도 다시 인사를 했죠.
역시 마음에 별로 안드는군요. 생기기는 꼭 기생오래비 같이 생겨가지구...
당분간 회사생활하기 힘들게 생겼어요. 빨리 이 프로젝트가 끝나야지...

근데 아직 밀레니움의 n 두개는 처리를 못했네요. 그래서 그런지 영철이란 사람 얼굴 보는게 조금 쑥쓰럽기도 하구요.
갑자기 저한테 "아직도 n이 한갠가요?" 그렇게 물어볼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것에 굴할 신희정이 아니죠.

그런데 저 남자는 오늘도 늦게 퇴근하려나 보네요. 자리에 앉아서 화면을 골똘히 쳐다보고 있어요. 대체 무슨일을 하는걸까요.
슬그머니 옆을 지나가는 척 하면서 쳐다보았어요.
내참... 스타크래프트를 하구 있군요. 그렇다면 예전에도 혼자 열심히 남아서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었던 거로군요...
그런데 실력은 형편 없는데요. 저렇게 하다간 초반에 박살나기 쉽상이죠.
그것보라구요. 벌써 게임이 끝났군요. 호호... 괜히 머리만 긁적이다가 멋적은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네요. 한번 피식 웃어주고 제자리도 돌아왔어요.


그남자

우씨... 좀 쪽팔리다. 저여자가 내 게임하는모습을 유심히 쳐다보고 갔다.
게임에 집중하느라 누가 보는지도 몰랐으니...
그런데 내가 게임에 지고나니 비웃듯이 웃고가는건 또 뭐냐. 지가 한번 해보라지 그게 그렇게 쉬운가...
어쨌거나 지난번 겨우 한번 컴퓨터에게 이기고 나서는 더이상 이길수가 없다. 빌드오더를 수정해야 겠다.

그런데 왜 자꾸 이쪽을 보면서 웃는걸까. 아마 내 실력에 감탄했나보다.
뭐 이정돌 가지구 그러나.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수 가르쳐주면서 나의 재물로 삼아야겠다. 후후후...

저여자 집에 가려나보다. 나도 퇴근하려고 사무실을 나왔다.
그런데 회사 정문 앞으로 빨간차 한대가 지나간다.
어라. 신희정인가 뭔가하는 여자다. 빨간차라니... 빨간차에 앉아있는 그녀가
내 앞을 스쳐가면서 지나갔다. 흠... 그림은 좋군...
그래도 누군 차타고 퇴근하고 누군 지하철 타고 퇴근하고... 불공평하다.
내 앞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차 뒤꽁무니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저여자 좀 난폭인가보다
사거리에서도 전혀 개의치않고 끼어든다. 물론 깜빡이는 안쓴다. 무서운 여자다
역시 조심해야할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여자

이제 원만큼 사람들과도 친해지고 일도 익숙해진것 같아요. 그래도 아직 영철이란 남자와는 조금 서먹하네요. 그 밀레니움이 문제라구요...
오늘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팀원들이 모두 모여서 중간 회의를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남자가 발표를 하게 되었어요. 미리 준비해온 자료를 나누어 주고 발표를 하는데 갑자기 담당 과장님께서

"김영철씨. 밀레니움 영어 스펠이 어떻게 되죠?"

이러시는거예요. 그남자가 준비해온 자료엔 millenium으로 n을 하나만 적었네요.

"m.i.l.l.i.n.i.u.m 아닙니까?"

"이런... n이 하나 빠졌잖어... 자료준비를 좀 신경써서 해야되겠어."

"아... 예..."

이상한 일이네요... 전엔 n이 두개라고 저에게 큰소리 치더니 오늘은 왜 하나라고
하는거죠? 그런데 저를 보면서 인상을 마구 구기는군요. 제가 뭐라구 그랬나요?
근데 과장님은 별것도 아닌걸 가지구 사람들 앞에서 엄청 무안을 주시는군요.
저남자가 괜히 불쌍해보이는데요...


그남자

세상에 믿을여자 하나 없다더니... 난 저여자가 하나라구 박박 우기길래 내가 잘못 안걸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자신있게 millenium으로 적었지...
나의 명예에 중대한 구멍이 생겼다. 쪽팔리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망신을 당하다니...
저여자...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하긴 저여자한테 뭐라 그럴게 아니다.
내가 제대로 알고있던것을 헷갈렸으니...
그래도 너무 쪽팔리다. 그래서 그여자를 째려봤다. 아마 저여자도 나한테 미안한 생각을 하고 있을거다.

회의가 끝나고 그여자와 마주칠 때 한마디 했다.

"책임지세요"

"네? 뭘요?"

"희정씨가 우겨서 이렇게 된거 아닙니까?"

"영철씬 제대로 알고 있었던가 아니예요?"

"희정씰 믿었단 말입니다"

"절요?"

사실 믿진 않았다. 그냥 그게 맞는건줄 알았지... 우와..... 오늘 스타일 완전히 구겨졌다...


그여자

어머. 처녀보고 총각이 책임지라니요.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다 하지요?
괜히 자기가 줏대없이 굴다가 틀린걸 가지고 왜 저를 걸구 넘어지냐구요.
한편으론 고소하기도 한데 한편으론 조금 미안하기도 해요. 어쨌거나 저때문에 당하지 않아도 될 일을 당한꼴이니까요.

하루종일 풀이 죽어있는 그남자를 보니 괜히 저까지 신경이 쓰이네요.
일과 끝나기 얼마전에 차한잔을 사주려고 그남자 있는 곳으로 갔지요.

"차 한잔 하실래요?"

"차한잔 가지고 될일이 아닙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의 명예에 중대한 구멍이 생겼으니 희정씨가 책임지고
저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켜야 되는거 아닙니까?"

정말, 영어 단어 하나가지고 꽤나 거창하게 나오네요.
커피 한잔씩을 들고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하네요.

"어쨌거나 저때문에 그렇게 된것 같으니까 죄송하네요"

"된것 같으니까가 아니라 된거라니까요"

"어쨌거나 이 커피로 구멍난 명예를 조금 메꾸세요"

그남자가 멍청한 얼굴로 절 쳐다보네요. 호호...
이남자, 처음 보기보단 꽤 재미있는 구석이 있네요. 별것 아닌일 가지고 여자 한테 떼쓰는 모습이 왜이렇게 재미있게 느껴지는거죠?


그남자

괜히 걸구 넘어지구 싶다. 별일 아닌데... 걸어가는 그여자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려 보고도 싶다.

"차 한잔 하실래요?"

내참, 차 한잔 가지고 때울일이라고 생각하는건가? 기가 막히다. 내 명예를 들먹이며 그여자한테 협박을 했다. 조금 황당한 얼굴이다.
내가 생각해도 황당하긴 하다. 그래도 꿋꿋하게 밀고 나가야지.

"어쨌거나 이 커피로 구멍난 명예를 조금 메꾸세요"

구멍을 메꾸라고? 갈수록 태산이다. 먼저 커피를 다 마셨는지 오물오물거리던 입술을 갑자기 삐쭉 내밀더니 먼저 자리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그렇게 웃긴가? 계속 날보고 비웃는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다. 기분이 계속 나뻐야 하는것 같은데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다.
자리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내 손에 들려진 컵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갑자기 웃음이 피식 나오는건 왜일까.
내 자리에 돌아가 앉아서 그녀가 앉은 쪽을 일부러 쳐다보는것 같지 않게 스쳐가듯이쳐다 보았다.
그녀가 앉은 의자 위로 브릿지 염색을 한 머리만 조금 튀어나와 보인다.

그만둬야 겠다. 뭐 이깟일에 명예를 들추나.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겠다.
한번 더 그 여자 않은쪽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그여자가 뒤를 돌아다 본다. 이크. 재빨리 고개를 돌려 앉다가 무릎을 책상모서리에 찧었다. 엄청 아프다.